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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4월 23일 Fr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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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인 니콘, 그러나 그대로여서는 안되는 세상"

  1959년 니콘 F가 발매되면서 시작된 이른바 '한 자리 수 플래그십'의 계보는 어느새 21세기까지 이어져 F6 발매라는 뉴스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니콘의 한자리 수 플래그십들이 매 발매시, 혹은 발매 전부터 세간의 수군거림과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전까지의 뉴스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신기한" 뉴스 취급 받게 되어버린 세태일 것입니다. 니콘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세상은 달라진 것입니다.
 

  숫자놀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필름 카메라에 더이상 진보할 구석이란 없다 라고 말입니다. 1Vhs를 보라, 이 놀라운 AF 속도를 보라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 놀라운 기능들과 45개나 되는 아이포인트를 보라 라고 말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것은 미놀타의 어느 기종으로 바뀌기도 하고, 같은 니콘의 실속형 경량 기종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연사능력 이야기로 바뀌기도 하고, 전자회로 이야기로 바뀌기도 합니다.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머리 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필름은 끝났다! 이제는 디지털이다!
 

  그들에게 F6의 발매는 신기한 뉴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디지털 기술에 비하면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는 스펙, 별로 달라보일 것 없는 모양의 필름 바디를 21세기에 신제품으로 내놓는 니콘의 고집이 그저 신기하고 이해안되는 뉴스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읽은 스펙을 외워 아는 체하고, 다른 기종의 스펙과 비교하는 게 그들이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숫자'입니다. '숫자는 현실을 상징합니다. '현실적으로'라는 말이 그들의 금과옥조입니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F6 만큼 '비현실적'인 카메라는 없을 것입니다. 가격의 숫자나 스펙의 숫자 어느쪽을 보든 말입니다. 아니, 굳이 조금 더 비현실적인 카메라 이야기를 찾아볼 수도 있겠습니다. 비현실적으로 무겁고, 비현실적으로 과거에 집착하고, 비현실적으로 사진의 꿈을 바라보는 카메라- F5 이야기를 그래서 꺼내보려고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카메라"

  한 사람이, 혹은 한 기업이 수십년 간 하나의 가치를 고집하고 지켜내는 일은 어렵습니다. 하물며 그 가치라는 것이 어떤 유형의 이익이나 댓가를 수반하지 않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씁쓸한 일은, 그 지키기 힘든 것을 지켜내었다고 세상이 그를 칭찬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현실적'인 가치관이 팽배한 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렇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당장 고지식하다, 깐깐하다, 비현실적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는 곳이 이나라인 것을 생각해보면 고작 다른 나라의 카메라라는 물건에서 '원칙'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하는 씁쓸함을 새삼 되씹게 됩니다. 니콘이 F마운트를 고집하는 것을 두고 "시대에 뒤떨어졌다" "그때문에 현재 기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동렌즈가 뭐 중요하냐, 이렇게 좋은 스펙의 현대 렌즈들이 있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러한 '현실적'인 이익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있다고 설명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일 것입니다. '현실'에 세뇌된 천민자본주의의 가엾은 양산품들. 아마도 니콘의 F마운트는 그런 다수의 대중들이 아닌, 세상엔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지켜져왔을 것입니다. 수 십년을 훌쩍 되돌려놓은 S2의 재발매라든지, 하이브리드 타입 기계식 바디 FM3A의 개발이라든지 하는 니콘의 고집이 만들어온 작은 기적들, 그 감동을 다수의 대중들이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마도, 왠지 돋보기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나무책상 앞에서 먼지만한 나사며 기어들을 만지고 있을 것 같은 니콘의 기술자들이 받고 싶은 칭찬도 그들의 박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니콘의 한 자리 수 플래그십들이 지켜왔던 외면적인 고집은 분리형 펜타프리즘, 수동 필름감기 크랭크, 수동렌즈 사용가능의 F마운트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F6가 그 중 한가지- 분리형 펜타프리즘을 포기한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스펙이 빠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닌, 니콘이 '현실적'이라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가치 앞에 항복했다는 하나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은 간과하기 쉽지만, 펜타프리즘을 분리형으로 제작하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기술적으로 볼 때 하나의 바디를 성형하는 것보다 분리형의 프리즘과 그것을 전제로 한 바디를 제조하는 것이 훨씬 힘든데다, 그 바디가 최고의 방습/방진 능력이 요구되는 플래그십이라면 더더욱 그러한 기술적 완성도는 실현하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수지를 맞춰야 하는 기업에게 분리형 프리즘은 고통스러운 원가상승을 수반합니다. 반면, 프리즘이 분리되어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란 것이 그리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용도에 맞게 다수의 프리즘을 교환할 수 있다는 장점, 스크린 교환과 파인더 청소가 쉽다는 장점 정도가 고작입니다. 당연히 '현실적'인 잣대로 본다면 그러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점 때문에 프리즘을 분리형으로 만들 이유란 없습니다. 앵글파인더라는 실용적인 악세서리도 있고, 귀찮은 청소는 A/S점에 맡기면 됩니다. F3의 프리즘을 스크린 위로 미끄러뜨리듯 장착할 때의 미묘한 정서적 일체감과 '딸깍'소리와 함께 단단히 고정되는 놀랍도록 정교한 체결감, 그러한 느낌들이 사용자에게 주는 믿을 수 없는 만족감 같은 것들을 그러한 현실주의들에게 납득시킬 방법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아마, 똑같은 이유로 니콘의 노기술자들도 그런 '보이지 않는 기술'과 관련해 더이상 경영진이나 재무담당자들을 설득할 수 없었겠지요.
 

  재미있는 것은, F5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이 옛스런 기체가 필름감기 크랭크를 탑재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F5는 당연히 고속의 필름자동되감기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 조작에 이중 삼중의 기계적 안전장치를 배려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예전의 모든 카메라가 그러했듯 손으로 크랭크를 돌려 필름을 되감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필름의 끝단을 남기는 것은 타사의 제품처럼 전자적 메뉴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으로 돌리는 크랭크와 LCD창에 자동으로 표시되는 필름의 역카운트 숫자로 쉽게 조작할 수 있습니다. 즉, 카운트가 1이 될 때까지 되감고, 필름카운트가 1이 된 후 크랭크가 완전히 헛돌기 전에 멈추고 뒷뚜껑을 열면 되는 것입니다. 필름을 되감는 단순한 조작 하나에서도 '자동과 수동 각자의 영역에 대한 고집'이라는 이 바디의 제조철학은 명쾌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동으로 고속되감기가 되는 바디에 왜 돈을 들여 수동 크랭크를 달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 고집스런 카메라를 구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보다 천이백배쯤 많을 것입니다.

 

"무거워야 한다면 무거워지겠다"

  F6가 그립 별도 부착의 디자인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이야! 잘됐다, F5는 너무 무거웠다구" 한 사람들과 "니콘이 왜....?" 한 사람들. 주지하는 바, 이전 세대의 플래그십들이 그립 일체형으로 개발된 것은 당시의 기술상 바디 분리형의 그립이나 모터드라이브들이 그 연결부에서 곧잘 문제를 일으켰고, 배터리의 능력 한계로 인해 고속의 연사 등을 가능하게 하려면 부득불 대용량의 전원을 바디에 기본 탑재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그러한 기술적인 한계들은 현재에 이르러 대개 극복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조사의 입장에서는 굳이 21세기에 출시되는 새로운 모델을 그립일체형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의 바디가, F5가 왜 그렇게 무거워야 했는지 그 제조철학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F6의 날렵하고 가벼운 바디는 지극히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무거워야 한다면 얼마든지 무거움을 감당하겠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이 고집불통의 시리즈를 지난 반백년간 숨쉬게 한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웬만큼 단단한 바닥이라면 떨어뜨려도 상처나지 않는 바디, 보증회수 15만회의 셔터유닛과, 티타늄으로 전체를 감싼 분리형 펜타프리즘, 초당 8콤마의 하이스피드를 가능하게 한 강력한 기계부속 등을 감안한다면 1,210그램이라는 무게는 기꺼이 양해할 수 있는 무게입니다. 단지 스펙상의 요소들이 그 무게의 전부를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F5의 셔터유닛에는 센서가 연결되어 지정한 셔터스피드에서 오차가 생기면 아예 셔터가 눌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 셔터를 누르려면 A/S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왜 일부러 이렇게 제조사에 불리한 장치를 탑재시켰을까 싶지만, 1996년 발매 이래 단 한 건, 단 한 대도 셔터속도 부정확으로 인한 A/S를 보고받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에 접하고 나면 니콘의 그 우직한 고집과 자신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스펙상 AF 속도가 어떻네, 연사능력이 어떻네 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역시 이해되지 않을 이야기이지만 말입니다. 전초점이네 후초점이네 하는 것들이 자기 바디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이고 일어나면 수리받아서 해결하고 만족하는 일이 되어버린 요즘의 세상에서는 오히려 F5의 이러한 '비현실적인' 고집이 비정상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더 빨리 된다"고 광고하고 싶어하기 보다 "더 제대로 되야 한다"고 믿는 기술자들이 기름밥을 먹고 살 수 있게 해줄 소비자들은 급격히 멸종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강력한 내장 AF구동 모터는 이 강직한 바디가 고수하고 있는 본질적인 미덕 중 하나입니다. 같은 CAM 1300 유닛을 사용하면서도 F100의 그것보다 체감상 훨씬 강력하게 회전합니다. 50mm나 35mm 단렌즈쯤은 어린아이 잡고 장난하듯 돌려버립니다. 그야말로 렌즈를 ‘지배’하는 모터입니다. 이런 비슷한 느낌의 모터는 디지털 바디인 D1 계열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AF가 조용하고 부드러우면 현실적으로는 이익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D2H에 이르러선 훨씬 정숙하면서도 정교한 AF 유닛으로 대체되었지만, 아무래도 그 강력한 존재감에서는 F5/D1의 그것만 못한 게 사실입니다. 카메라가 단지 ‘동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사진 찍는 행위 자체에 카메라의 독자적인 존재감을 부여해야 하는 것인지는 사진가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것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F5는 매 셔터마다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아니! 느낌을 바라보기 위해서!”

  F5의 파인더는 어둡습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둡고 따뜻합니다. 어두운 것과 따뜻한 것- 양 쪽이 모두 3D-RGB측광이라는 측광기술과 상관이 있습니다. 1005개의 측광센서가 화면 전체의 밝기와 거리, 콘트라스트, 심지어 색 정보까지 분석하여 최적의 노출값을 결정하는 이 첨단의 노출시스템은 이제 니콘 SLR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F5의 기본 탑재 파인더인 포토믹 파인더 DP-30의 포커싱 매트에는 RGB센서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이때문에 파인더를 들여다보면 전체적으로 노란색 기운이 감돕니다. 이 노란 기운은 피사체를 실제보다 훨씬 따뜻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는 대신, 전체적으로 파인더를 어둡게 만든다는 단점을 수반합니다. 더 최신의 기종인 F100의 파인더와 비교해보면 F100 쪽이 훨씬 밝고 선명해 보입니다. F100의 파인더에는 푸른색 기운이 감도는데 푸른색은 노란색보다 더 차갑고 선명한 느낌을 주는 색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F100에는 3D-RGB측광 기능이 빠져있기 때문에 그만큼 파인더로 오는 빛의 손실을 줄일 수 있으니 그 밝기의 이득은 당연한 것입니다. 파인더의 밝기와 색감은 카메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건 카메라 카탈로그의 스펙 부분에는 나오지 않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자기 몸처럼 아끼는 이라면, 사진 찍는 일을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하는 이라면 파인더의 밝기와 느낌은 어떤 다른 스펙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콘탁스 RTS 3의 파인더를 들여다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그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RTS 3의 파인더 하단, 각종 정보가 표시되는 부분의 푸른 보라빛 계기가 주는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RTS 3의 진공흡착판이 주는 장점을 넘어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름지기 한 메이커의 플래그십이란, 그 정도의 감성품질을 기본으로 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성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사치에 불과하겠지만 말입니다. 하기야, 지금도 우리는 여러 카메라샵의 카운터에서 RTS 3의 내부 액정이 망가졌다며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는 사용자들을 만날 수 있지요.
 

 F6의 파인더는 훨씬 밝아졌다고 합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밝기로 유명했던 F3의 명성을 현대에 되살렸으니 분명 기뻐할 일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니콘의 플래그십들은 육중하고 윗면이 납작한 형태의 분리형 프리즘을 탑재해 왔습니다. F6의 뾰족하고 날렵한 프리즘이 시리즈의 원형인 니콘 F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머리 속에 각인된 니콘스러움과 달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F3만큼 밝으면서 F4나 F5만큼 단단한, 그리고 무슨 색이든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차있는 파인더가 아니었을까요. 늘어난 인디게이터 수라든지, 편해진 인터페이스라든지 하는 것- 그런 것들에 니콘의 정신이 깃들어 잇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요.

 

“차가운 사진기가 뜨거운 사진가를 이끈다”

  박스를 열고 비닐에 쌓인 F5 바디를 처음 꺼내들던 순간의 느낌을 아직 기억합니다. 차.갑.다.....! 금속이니 당연히 차갑겠지만, 아마도 그 차가움은 오십년을 천착해온 한 카메라 메이커의 치열한 정신적 완결성에 깃든 냉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차가운 카메라를 꼽으라면 단연 콘탁스입니다. 바디에 사용된 금속 질감의 우수성, 돌기가 없고 끈적이지 않으면서도 차갑게 달라붙는 느낌의 고무그립, 보기만 해도 차가운 순흑의 도장... 콘탁스의 바디가 그 뒤떨어진 전자성능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골수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유는 물론 칼짜이스 렌즈를 사용가능한 바디라는 점에 있지만, 진짜 콘탁스 바디의 마니아들에겐 마치 손으로 뇌가 옮겨간 듯한, 그래서 뇌로 직접 느끼는 듯한 그 차가움이야말로 콘탁스의 존재감을 상기시켜주는 첫번째 요소입니다. 그런 느낌을 주는 또다른 바디로는 핫셀블라드의 XPAN이 있습니다. 이 이색적인 듀얼 파노라마 포맷 카메라의 검은색 도장 역시 시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콘탁스 수준의 차가움에 도달해 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캐논의 nF-1이 있습니다. 타메이커에서 찾아보기 힘든 순무광의 도장에는 당시 캐논사의 자부심이 스며 있습니다. 그리고 현행의 SLR 카메라에 이르러 그만한 차가움을 간직한 바디를 대라면 니콘의 F5와 캐논의 1V 정도를 거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두 바디 공히 양사의 플래그십다운 훌륭한 질감과 차가운 존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훌륭한 질감과 촉감을 위해서는 현시대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현실적'인 면에서의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nF-1의 도장은 잘 벗겨져 험해지기로 유명하고 XPAN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콘탁스의 고무그립엔 쉽게 땀이 묻고, F5의 고무그립은 수년이 지나기 전에 곧잘 들뜨거나 벗겨집니다. 아무래도 감수성과 현실성을 가장 적절히 절충한 재질의 바디는 1V가 아닐까요. F6에 이르러 니콘의 차가움은 적지않게 미적지근해진 느낌입니다. 그럴리 없겠지만 왠지 눈으로는 바디의 외피에 사용된 금속이 얆아보이고, 경박해 보입니다. 그 펜타프리즘에 새겨진 로고가 니콘의 그것이 아니었다면 관대히 넘어갈 수 있을 부분이겠지만, 그 하얀 마크를 붙인 이상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묵직하고, 차가운 어떤 모습으로 등장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지난 시대에 발묶인 구닥다리 불평인 걸까요. 차가운 사진기가 뜨거운 사진가를 이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공상가의 한가한 헛소리인 걸까요.

 

“세상을 바꿀 수 없더라도 나를 바꾸지는 않겠다”

  얼마 전 종로의 코아아트홀이 문을 닫았습니다. 거의 유일하다고 할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수준작과 작가주의 영화들이 개봉되던 상영관이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우리나라에 남은 마지막 LP제조사였던 서라벌 레코드가 기계들을 헐값에 처분하고 사장의 눈물과 함께 문을 닫았습니다. 인켈이 만들던 수준급의 스피커들은 원가 문제로 더이상 생산되지 않고 시류에 영합한 톨보이 스타일의 얄팍한 스피커들만 넘치도록 생산되고 있습니다. 음질이야 어찌 되었건 가지고 다니기 쉬운 MP3가 여기저기 넘쳐나 시대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돈주고 열심히 음반 만드는 뮤지션들의 음악을 제 돈 내고 구입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 당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기계식 무브먼트를 제조하던 유수의 스위스 시계회사 들은 거의 폐업하거나 합병되어 이제 이세상에서 기계식 무브먼트를 만드는 회사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원가 만원이면 충분히 만드는 쿼츠 무브먼트들을 수억개씩 찍어내고 있습니다.
 

 카메라라고 다르겠습니까. 앞다투어 스펙을 높이고, 작게 만들고, 가볍게 만들고, 싸게 만들면 그만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제대로 만든 물건과 장사속으로 만든 물건을 아무도 구분해 주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도 스펙만 좋으면 잘 팔리는 렌즈들이 넘쳐납니다. 정교하게 동작하지 않아도 이미 사람들의 감성과 지적수준이 그만한 정교함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별 문제 없는 세상입니다. 조리개링이 없어도 아무 불만 없이 플라스틱 다이얼로 조리개'값'을 바꾸면 되고, 도달해 있는 수준의 기술도 기업의 이익이나 마케팅 수순에 의해 조절해가며 탑재하고, 인건비나 상당한 원가가 드는 부분은 싸구려 전자부품으로 대체해도, 그래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신제품이면 모두가 흥분하고, 금방 다른 흥분이 그것을 대체합니다. 광고가 소비자를 이끌고, 군중심리와 값싼 집단화가 트렌드를 정신없이 바꿔 갑니다. 8년의 세월을 격한 니콘의 새로운 플래그십은 파인더를 분리할 수도, 백을 교환할 수도, 이음새 없는 매끈한 그립 일체형 바디를 쓰다듬을 수도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F5에서 오히려 F3를 그리워했던 소수의 전통적 지지자들에게 그것은 주체하기 힘든 실망이었을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F5는 아직 타협하지 않던 시절의 니콘이 만든 마지막 명품일지 모릅니다. 지나치게 무거워도, 필요 이상으로 진지해도, 한 시대를 당당하게 이끌 기함이라면 의당 가지고 있어야 할 아우라를 가진 기체. 더 진보한 카메라는 끝없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더 강력한 기능, 더 편리한 인터페이스를 가진 카메라들이 속속 등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시대의 진지함, 지난 시대의 순수함으로 만들어지는 카메라는 더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현실적’이라는 검열의 창이 훼손시키지 않은 순수한 기계로서의 카메라 말입니다. 기대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이제 라이카나 짜이스 이콘을 향해서일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정교하고 치열한 장인정신의 옛수호자에게 가장 우선적인 비극이겠지만, 동시에 기계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기계를 소유함으로써 인간이 지향하는 완결성의 한 극단을 맛볼 수 있다고 믿는, 하향평준의 통속하고 일방적인 가치 속에서 전세대의 고결한 유산을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던 모든 이들이 함께 감당해야 하는 날카로운 슬픔일 것입니다.
 

니콘 F5는 떠들썩한 공식 발표 없이 2004년 어느날 조용히 단종되었습니다. 사라져버린 수많은 소중한 것들, 소중한 가치들이 대개 그러했던 것처럼....

2019-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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